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추상적이지만, 실제 생활의 관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학문입니다. 우리가 배워왔고, 현재에도 배우고 있는 다양한 실천적 지식들 역시 철학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물리학, 미학, 수리학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들입니다.
앞서 철학은 세계를 해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물이며, 무언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고정된 개념의 '영원한 존재'를 기준으로 삼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그 하위 개념들을 확장시키며 세계를 설명해왔는데, 돌이켜보면 그들의 이성적 사고 능력을 압도할 만한 물질문명이 아직 미약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요? 고정된 개념에서, '존재 자체로서의 변화'로 기준을 바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는 다르니까요.
아무튼, 체계가 어떻든지, 변하지 않는 것은 사유(思惟)의 힘입니다. 유명한 ‘동굴의 우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감각적 인식에서 벗어나 동굴 밖으로 나와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볼 수 있는 지성적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지혜에 이르는 길이며, 이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은 사유(思惟)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정신적 빈곤은 사유의 힘이 약해진 탓이며, 과거에 비해 우리의 교육이 퇴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사유(思惟)를 해야한다고 했더니 사유(思惟)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덤비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과거와 비교할 때 현재의 청소년들이 배우고 있는 학문의 난이도는 매우 높아져서,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도 요즘 학생들이 풀고 있는 문제집을 들여다보면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설명은 더욱 거창합니다. 논리와 추론과 공간감각, 구성력 등을 종합적으로 접근한 문제라는 친절한 광고문구(?)가 보는 이의 가슴부터 오그라들게 만듭니다. 지금의 우리 자녀들은 이런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나서 그 배움을 검토하기 위해 문제를 풀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뒤바뀌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견뎌야하는 인내도 필요하겠지만 가슴 한켠이 먹먹한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잘 훈련된 아이들의 사고력은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입니다. 어른이라고 쉽게 대했다가는 말문이 막혀서 체면을 구기는 일도 다반사인 지경이고, 막무가내식의 자기 주장이 효과(?)를 보이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소통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왜 이 아이들이 성장의 결정체로 인식되지 않는 것일까요? 사유를 통한 성장과 지성적 인식의 확장은 보다 더 안정되고 행복한 자아를 만들어내는데, 현재의 아이들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는 후세에게 전하고 싶은 그 ‘바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해야할 두번째 단계는, 자신이 뛰어든 '모험'에 자녀를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얏호~~~ !! 라는 즐거운 비명과 함께 말이죠.
미강 정신건강의학과 / 정신과
박수경